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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 역사(19)

by 톡톡톡 레이나 2025. 4. 12.

전후 반 식민지운동_말라야와의 분리

 1945년 9월 5일 싱가포르에 복귀한 영국은 곧바로 말라야와 싱가포르를 분리하는 식민지체제 개편안을 발표했다. 영국식민성이 기초한 말라야 연합안이 그것이었는데, 9개의 말레이주와 해협식민지였던 페낭, 말라카 두 주를 말라야연합으로 통합하고, 싱가포르는 직할식민지로 분리 유지하여 말라야연합과 싱가포르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1946년 4월 1일 말레이 연합이 정식으로 출범함에 따라 싱가포르는 단독으로 영국의 직할식민지가 되는 동시에 일본군정 체제로부터 영국 식민지사가 통치하는 민정체제로 전환되었다.


 영국의 전후 구상은 싱가포르 섬(싱가포르)과 말레이 반도(말라야)를 분리함으로써 양자를 동시에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영국은 말라야를 독립시킨 이후에도 계속해서 싱가포르를 확보하기 위해서 직할식민지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영국에서 싱가포르는 대 아시아 수출의 전진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기지이자 정치적 발판이었던 것이다. 한편 친영 말라야 건설을 확신했던 영국은 이민자에게도 동등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말레이인 우대정책에 따른 중국계와 인도계 등 비말레이인들의 반발을 해소하려 했다. 따라서 영국은 중국인이 절대다수를 점하는 싱가포르를 ‘잠정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말레이인들의 거부감을 덜 수 있다고 계산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라야연합의 평등주의는 말레이인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말레이인들은 비말레이인들에게 시민권이 대폭 허용됨으로써 자신들이 누려온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으며, 경제적으로 우세한 중국인들로부터 예상되는 정치적 압박에 대해서도 불안감을 드러냈다. 말레이인들의 불만은 말레이인 최초의 대중운동기구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 United Malay National Organization)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영국이

 복귀하여 정치적 재편을 서두르고 있던 당시는 말레이인과 비말레이인의 갈등, 말레이공산당(MCP)의 위협, 말레이계 급진세력들에 의한 인도네시아와의 합병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돌출하여 매우 혼란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전후 국제사회에 범세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냉전체제 속에서 반공정권을 창출하여야 할 전략적 의무를 갖고 있던 영국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 인종 평등주의에서 후퇴하여 친영적인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과 타협하는 차선책을 선택했다. 말라야에서 싱가포르의 분리는 영국의 전후 식민지 재편이란 외적 요인과 말레이인과 중국계가 주종을 이룬 비말레이인들 간의 인종대립이란 내적 요인이 빚어낸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잠정적 분리’는 싱가포르 정치발전에 새로운 토양을 제공함으로서 ‘항구적 분리’로 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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