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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 역사(21)

by 톡톡톡 레이나 2025. 4. 14.

자치의 확보_정치운동의 고양과 인민행동당 창당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서 공산게릴라 활동을 진압하는데 성공한 영국은 공산주의가 주도하는 반식민지운동을 무력화할 의도로 자치정부 이양을 가시화하기 시작하였다. 1945 2월 렌들안으로 불리는 싱가포르 행정제도 개편안이 공포되었다. 이 안의 골자는 싱가포르 입법회의의 의원 수를 32명으로 늘려 그중명은 직접선거로 선출하고, 9명으로 구성되는 각료회의에 6명의 입법의원을 임명하며, 시민권부여 기준을 대폭 확대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국방과 국내 치안에 대한 권한은 전적으로 지사의 소관으로 남겼다.

 

 렌들안은 협력정당의 집권을 전제로 식민지 후견정책을 고수하기 위한 영국의 기만적인 양보조치였다. 그러나 렌들안을 계기로 시민권이 확대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새롭게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이는 싱가포르에 대중정치 시대의 개막을 예고하는 것이었으며, 소외되었던 중국어 세계가 비로소 정치적 다수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상사태 선언 이후 취해졌던 제반 규제가 완화되자 이축되었던 싱가포르의 정치운동은 이러한 양보의 틈을 비집고 독립에의 길을 재촉하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중국어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하였다. 당국이 2,500명의 중국인 학생들을 징병하기로 하는 조치를 취하자 이에 반대하여900여 명의 학생들은 1954 5 13일 징병반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폭동으로 비화했다. 48명의 학생이 구속되고1,0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하는 사태로 발전한 것이었다. 5.13 폭동으로폭동으로 지칭되는 이 사건은 친공, 반식민 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어학교 학생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아래 싱가포르중국인중학교학생동맹(SCMSSU)을 결성하고 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들 학생운동은 같은 시기에 활동을 재개한 노동조합운동과도 연계되었다. 1954년 싱가포르공장노동자노조(SFSWU)와 싱가포르버스노조(SBWU)가 결성되어 반식민 노동운동이 부활했다. 이 노동운동은 림친시옹과 퐁쉐수안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말레이반도에서 농촌봉기에 실패한 말레이공산당(MCP)은 말레이 반도의 밀림 대신 중국어학교와 노동조합 등 싱가포르의 중국어 세계에 그들의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55년의 입법의원 선거를 앞두고 1954년 데이비드 마샬과 림유혹의 주도로 싱가포르사회당(SS)이 창당되었다. 싱가포르 정계가 싱가포르사회당의 등장으로 재편되면서 영어세계에서도 새로운 좌파 엘리트들이 빠른 속도로 정치세력화하게 되었다. 이들 좌파 엘리트들은 전후에 영국에 유학한 리콴유(Lee Kwan Yew)와 고켕쉐(Goh Keng Swee), 토친체(Toh Chin Chye), 번(K.M Byrne) 등 소위 초기의 리콴유 그룹이었다. 리콴유는 1950년 귀국하여 정부기관 노동조합의 영어교육을 받은 노동자들을 대변하는 고문변호사로 활동하였다. 리콴유 그룹은 이들 노동자를 대중적인 기반으로 1952년 연합행동위원회(CJA)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리콴유는 노동운동을 통해서 공산주의자들과도 관련을 맺게 되었다. 공산당은 통일전선을 위한 좌파세력과 제휴를 원했으며 리콴유 그룹도 공산주의자들의 대중조식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1954년 초양자는 협력에 합의하고 좌익정당 결성에 박차를 가하였다.

 

 5.13폭동은 리콴유와 그의 초기 동료들에게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특히 리콴유는 구속 학생들을 변호하면서 중국인 사회에 반식민 투사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리콴유는 이를 계기로 활력과 혁명으로 충만한 세계이자 공산주의자들이 30년에 걸쳐 다져온 중국어 세계의 무한한 잠재녁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4 11 21일 리콴유와 그의 동료들은 인민행동당(PAP: Peoples Action Party)을 창당하였다. 인민행동당의 노선은 급진적이나 반식민주위에 초점을 맞추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사회주의말라야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아울러 출생주의에 기초한 평등한 시민권의 부여를 주장했으며, 즉각적으로 싱가포르-말라야 통합론을 부활시켜 이들을 중점적인 정치 쟁점으로 만들었다. 인민행동당은 모든 반식민 세력과 연대를 표방하고 말레이공산당과도 제휴하였는데, 창당 주역 14명 중 8명이 친공산계 노동운동 지도자였다. 인민행동당은 창당 후 곧바로 중국어학교와 부두노동자 등 중국어 세계에 지지기반을 확대하면서 기존 정당들의 한계였던 비대중성을 극복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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