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점령기_싱가포르의 함락과 군정
1941년 8월 전쟁을 결의한 일본은 동남아를 점령하기 위해 남방군을 편성하고 정쟁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영국은 영국과 호주 그리고 인도토병과 말레이의용군 등 총 87,600명으로 구성된 극동군과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레펄스 외 순양함 3척, 구축함 4척, 전함 3척 등으로 구성된 동양함대, 그리고 246기의 극동공군을 말라야와 싱가포르 지역에 배치했다. 그러나 12월 8일부터 개시된 일본군의 전광석화 같은 말라야 기습작전으로 영국 공군과 해군은 순식간에 궤멸되고 말았다.
1942년 1월 말레이 반도를 점령한 일본군은 2월 1일 싱가포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싱가포르 화교의용군의 대일항전에도 불구하고 영국군 병력은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 중장은 1942년 2월 15일 일본 육군 제25군사령관 야마시타에게 무조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양함 프린스 오브 웨일즈호의 침몰과 싱가포르의 함락은 대영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와 동시에 영국 식민정부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던 싱가포르의 말레이인, 인도인, 중국인에게는 미지의 시대가 개막되는 시점이었다.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은 다음날 싱가포르 전도를 소남도로, 싱가포르시는 소남시로 개칭하고, 즉각 군정체제로 전환하였다.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한 일본은 동남아를 지칭하는 남방지역을 8개 권역으로 구분하고, 일본육군 제 25군으로 하여금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를 관할하게 하였다. 일본의 남방정책과 군정의 주목적은 군항 싱가포르를 확보하여 말라카 해협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고무, 보크사이트, 주석 등 전략물자를 안정적으로 획득하는 데 있었다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은 무엇보다 군사목적이 우선이었다.
일본 군정의 대민 정책은 아시아인들의 평등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인종 간의 차이를 제도화한 점에서 영국 식민정부의 정책과 다를 바 없었다. 싱가포르에 억류된 유럽인은 시설이 매우 열악한 수용소에 연금되었으며, 공개적으로 부역을 강요당했다. 인도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는데, 싱가포르와 말라야의 인도독립동맹과 인도독립군 등이 일본의 중요한 동맹세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말레인들에 대해서는 토착종족으로 간주하여 각별한 신경을 썼다. 중국인에 대한 말레이인들의 적대감을 부추기는 한편, 말레이인들에 대한 기술교육을 강화하고 지원군, 지원대, 병보 등으로 이들을 징용 대상으로 삼았다.
말레이인들을 위한 병보훈련소, 경찰훈련소, 어업훈련소, 선원훈련소 등이 일본 군정당국에 의해서 소남도에 개설되었다. 이러한 시설을 통한 교육훈련 과정에서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은 말레이 반도의 동족과 접촉하면서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다. 또한 군정당국은 부족한 싱가포르 현지의 관리를 양성하기 위해서 소남흥아훈련소를 설립하였다. 이 훈련소에 말레이인들을 대거 입소시켜 단기 교육훈련으로 초급관리를 양산하였다. 이로서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은 일본 군정을 통해서 후일 영국인 관리가 없어도 행정을 꾸려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정의 대 중국인정책은 이중적이었는데, 경제적 동반자이자 동시에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했다. 중일전쟁에 참전했던 제 25군은 ‘현지 주민과의 화해 지침을 따르지 않았다. 점령 직후 이들은 싱가포르의 화교에 대해 헌병대의 집단검열을 개시하고 항일화교 숙청에 나섰다. 검거된 항일 용의자들은 7만여 명에 달했으며, 트럭에 실려 나가 해안에서 사살된 중국인 희생자의 수는 5,000여 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4만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일본 군정은 또한 소남화교협회에 대해서 5천만 해협달러의 강제헌금을 부과했다. 이 협회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으나, 중국에 귀속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화교들을 중국인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일본군정의 의도로 만들었다는 증언이 설득력이 있다.
일본군정은 계속해서 헌병대를 동원하여 중국인 항일분자를 수색하고 이들에 대한 감시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전황이 악화되자 중국인에 대한 단압이 완화되어 동반자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1943년 이후에는 중국인을 소남특별시 자문위원회에도 참가시키는 등 일본군정과의 협력을 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기는 중국인들에게 공포와 굴욕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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