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의 출현과 반식민지 통일전선운동
새로운 정치질서를 기대했던 싱가포르의 정치세력들은 영국의 전후 구상에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1945년 12월 21일 말레이민주동맹(MDU)이 출범했는데, 이 정치세력은 싱가포르 사회에 기반을 둔 최초의 비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민주동맹은 영어교육을 받은 중국인, 인도인, 유라시아인 지식인들이 주도했다. 싱가포르를 포함한 자치 말라야의 건설과 인종평등주의를 주창한 민주동맹은 공산당과도 협력은 하였지만 대체로 온건한 정책노선을 취하였다. 공인된 정당으로 대두한 말레이공산당(MCP)은 전후 최대의 정치세력이었다. 공산당은 말레야연합을 거부하고 공산말라야 건설을 위한 반식민 통일전선 운동에 주력했다. 이들은 1946년 싱가포르노조연맹(SFTU)을 결성하고 1947년 중반까지 60퍼센트 이상의 싱가포르 노동조합을 연맹 산하로 끌어들였다.
1946년 말 영국과 움노(UMNO)의 밀착으로 싱가포르에 새로운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영국은 움노의 요구를 수용하여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구체화한 말라야연방(Federation of Malaya)을 추진하였다. 이에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민주동맹(MDU)의 영어 엘리트와 미말레이인, 그리고 반공 말라야연방의 출현을 두려워한 공산주의자들은 반 말라야연방 통일전선을 구축했다. 그 결과 1946년 12월 14일 싱가포르의 좌우익과 공산주의 대중조직을 망라한 통일행동회의가 결성되었다. 이는 1주일 뒤 범말레이통일행동회의(PMCJA)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말레이국민당(MNP)이 조직한 국민운동본부(PUTERA)와 함께 PMCJA-PUTERA 연합운동을 전개했다.
PMCJA-PUTERA 연합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하는 노동조합을 대중적 기반으로 하여 즉각적인 자치의 실현과 자유민주주의, 비인종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말라야연방안에 대한 반대여론을 주도적으로 조성해 나갔다. 게다가 보수적인 싱가포르의 화교상공회의소(CCC)로 평등한 시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인식 아래 말라야연방안에 반대하여 PMCJA-PUTERA연합과 제휴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서 CCC-PMCJA-PUTERA연합이 구축되었다. 이 연합운동은 1947년 10월 10일 말라야 역사상 최대의 정치파업으로 기록된 전국적인 철시를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통일전선운동은 영국의 공산주의와 공산당 탄압 속에서 급격히 쇠퇴하고 말았다. 통일전선의 주축이었던 말레이공산당이 합법투쟁에서 무력 투쟁으로 투쟁노선을 바꾸고, 경제적인 이해를 고려한 화교상인들이 영국 쪽으로 선회한 것이 주요한 원인이었다.
1948년 2월 1일 말라야연방이 출범하였고, 같은 해 4월 싱가포르에서는 6석의 입법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싱가포르 최초의 선거가 치러졌다. 민주동맹이 불참한 가운데 치러진 이 선거에서 해협화영협회의 후원으로 1947년 8월에 창당한 싱가포르진보당(SPP)이 3개 의석을 차지했다. 무장투쟁으로 선회한 말레이공산당은 말레이 반도에서의 항영 게릴라활동과 싱가포르에서의 대규모 파업폭동을 벌였다. 영국은 말레이공산당의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말라야 전역에 12년에 걸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도 1948년 6월 23일부터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비상사태 선언으로 싱가포르의 정치무대는 반 말라야연방 통일전선 등 좌익 주도의 대중정치가 퇴조하고, 영국 식민당국의 후견정책에 보조를 맞춘 싱가포르진보당(SPP)과 싱가포르노동당(SLP)등에 의한 협력정치가 우세하게 되었다. 이들 협력 정당들은 영어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주축을 이룬 정당으로서 영국 식민 당국과 영어세계의 이해를 대변하였다. 또한 이들 정당들은 ‘선자치 후통합’이란 점에서 정강이 공통적이었다. 이들은 말라야연방에 흡수 통합되는 것을 반대하고 싱가포르 자치정부를 위한 점진적인 개혁에 주력했다.
비상사태와 협력정치의 기간 동안 싱가포르 주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이른바 중국어 세계는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며, 싱가포르-말라야 통합문제는 뒤젓으로 밀려났다. 싱가포르노조연맹이 휴면상태로 들어가면서 노동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공식적인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이에 따라 민주동맹도 비상사태 하에서는 싱가포르-말라야의 통합과 공산당과의 협력을 통한 독립실현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1948년 7월 24일 자진 해산 하였다. 민주동맹의 해산은 영어교육을 받은 급진적인 지식인들에 의한 반식민지 통일전선운동의 첫 시도가 좌절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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