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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 역사(16)

by 톡톡톡 레이나 2025. 4. 9.

인도인과 말레이인의 정치적 각성

 싱가포르 인도인들의 정치활동은 중국인들만큼 활발하지 못했다. 1923년에 싱가포르의 인도인협회가 결성되었다. 이 협회의 지도자는 변호사, 의사, 고급기술자 등 전문직업인이 많았고, 회원들은 승려, 교사, 하급관리, 회사원 등이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인도인협회의 성격은 저이적이라기보다는 사교모임의 성격에 가까웠다. 인도인들은 출신지역 별로 또는 카스트 별로 분할되어 있었고, 이러한 내부의 분열은 통일된 조직 결성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대공황을 겪으면서 인도인들도 자신들을 대표하는 조직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어 1937년에 이르러 말라야인도인중앙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협회는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에 산재한 12개의 인도인협회와 4개의 인도인상공회의소를 통합한 연합체였다. 싱가포르 인도인들의 정치적 각성도 인도 독립운동과 긴밀한 관련 속에서 이루어졌다.


 말레이인들의 민족주의의 형성에는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을 통한 외부의 이슬람세계와의 교류가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여기에서 쟈위 쁘라니깐으로 불리는 타밀계 인도인 무슬림과 말레이 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1876년 이래 말레이어 신문과 잡지의 간행을 주도했는데, 1906년 싱가포르에서 창간된 ‘알 이맘’이 대표적인 잡지였다. 이 잡지는 말라야를 비롯한 싱가포르 주변 이슬람세계의 타락상과 후진성을 비판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진정한 가르침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개혁을 주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기존의 질서를 구성하고 있는 장로그룹(Kaum Tua)에 대해 까움 무다(Kaum Muda)라 하여 청년그룹으로 불리었다.


 종교분야의 새로운 세대의 출현으로 세속적인 분야에서도 범 이슬람 운동이 나타났다. 이집트와 레바논 등 아랍지역에서 유학하고 싱가포르로 돌아 온 젊은이들은 유학지에서 또는 귀국 후에 인도네시아의 젊은 세대들과 잦은 접촉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운동에 공감하여 인도네시아와 연대를 고려하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38년 말레이청년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는데, 이 연맹의 목적은 식민지체제를 타도하고 인도네시아와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모하메드 유노스 압둘라(Mohammed Eunos bin Abdullah)

 


 영어교육을 받은 왕족이나 귀족출신의 엘리트 사이에서도 민족주의적인 성격의 사회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인물은 1924년 해협식민지 입법의회에 최초의 말레이인 의원으로 임명된 모하메드 유노스 압둘라(Mohammed Eunos bin Abdullah)였다. 그는 1926년 영어교육을 받은 언론인과 정부관리 그리고 무역상인들과 함께 싱가포르말레이연맹(Kesatuan Melayu Singapore)을 창설하였다. 이 연맹은 초보적인 정당형대를 취하기는 했으나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았다. 이들의 주장은 주로 반 화교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말레이인들이 중국인이나 인도인들처럼 정치활동을 행할 준비가 될 때까지 말레이인에 대하여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부여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서 말레이인들은 식민정부와 영국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하였다. 말레이인 우대정책을 표방한 싱가포르말레이연맹은 전후 통일 말레이국민조직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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