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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 역사(22)

by 톡톡톡 레이나 2025. 4. 16.

 

자치의 확보_자치협상과 리콴유의 집권

 1955 4월에 행하여진 선거에서 영국 식민당국이 기대했던 싱가포르진보당(SPP) 4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러나 마샬이 이끄는 싱가포르노동전선(SLF) 10석을 리콴유의 인민행동당(PAP) 3석을 얻는 등 좌파 정당들의 약진이 두드려졌다. 이는 유권자 자동등록제의 도입으로 비영어권의 중국인 노동자가 대거 투표에 참여한 결과였으며, 일반 대중들이 반식민주의, 사회주의 정당을 선호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마샬은 연정을 구성하고 싱가포르 수석장관(Chief Minister)이 되었다. 인민행동당은 진보당, 민주당, 무소속 등과 야당연합을 결성하고, 리콴유는 사실상의 야당지도자로 부상했다. 영국의 양보로 부여된 제한적 자치 아래 싱가포르의 정당들은 공산주의에 노출된 중국어 세계의 일반대중의 지지확보와 원활한 대영국 자치협상이라는 이중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러나 마샬 정부는 점증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소요와 잇따른 파업 속에서 정국을 주도할 조정 역할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마샬은 어렵게 영국과의 헌법회담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영국 식민정부와 중국어 세계로부터 공히 불신 당하고 있었다. 1955 7월 마샬은 자신이 지명한 고위 관리에 대한 임명을 지사가 거부하자 싱가포르의 통치자는 지사인가 마샬정부인가?”를 성토하며, 렌들안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였다. 마샬은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수석 장관직을 물러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영국 중부는 기존의 입장을 바꿔 자치협상을 수락하게 되었던것이다.

 

 1956 4월 모든 정당의 지도자로 구성된 싱가포르대표단은 런던으로 건너가서 영국과 제 1차 영국-싱가포르 헌법회담을 벌였다. 이 이회담의 쟁점은 싱가포르의 국내 치안을 누가 장악할 것인가에 있었다. 영국은 국방치안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의 결정권을 고등판무관에게 줄 것을 제안했다. 영국의 입장은 치안문제에 관한 한 결코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싱가포르가 베이징 정부가 조종하는 공산주의자들의 기지가 되도록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싱가포르와 영국 양국의 협상은 끝내 껼렬되었고, 마샬 장관은 사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6 7 7일 수석장관직을 계승한 림유혹은 영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9월에는 대대적인 반폭동 숙청작업을 전개했다. 치안 혼란이 자치권 이양을 저해한다고 판단한 림유혹은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중국어 학교와 각급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무차별한 탄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림유혹의 싱가포르노동전선(SLF)이 중국어 세계로부터 얻은 것은 영국식민주의의 주구라는 오명뿐이었다.

 

 1957 3월 림유혹은 다시 대표단을 이끌고 런던에서 제 2차 헌법회담을 벌였다. 1차 회담의 결렬 사유였던 치안문제는 국내치안위원회를 신설하는 선에서 합의를 보았다. 국내치안위원회는 싱가포르와 영국의 대표 각각 3인과 말라야연방의 대표 1인 등 총 7인으로 구성하였다. 영국인 고등판무관 대신 말라야 연방에 캐스팅 보트를 넘긴 것이 국방치안위원회와의 차이였다. 영국은 싱가포르의 치안에 대해서 친영, 반공적인 말라야연방을 끌어들여 외형상으로는 양보를 하면서도 치안문제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실질적으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한것이다. 2차 회담 결과 싱가포르는 영연방 내 자치국의 지위를 확보했다. 51명으로 이루어진 의회는 전원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51명으로 이루어진 의회는 전원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가 도입되고, 기존의 지사직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은 영국인 고등판무관의 소관으로 남아 있었으므로 사실상 치안권을 확보하지 못한 불완전한 자치였다.   

 

 자치권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치안위원회 구성에 만족하지 못한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일반대중을 선동하고 나섰다. 나아가서 인민행동당의 친공 좌파는 리콴유의 대표직 사임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림유혹은 1957 8월 두번째로 공산주의자 숙청을 단행하였다. 이 숙청으로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은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 인민행동당의 중앙집행위원회 구성원 12명의 위원 중 6명이 친공산계로 분류되었는데, 림유혹 정부는 이들 6명 중 5명을 구속하였던 것이다. 리콴유를 중심으로 한 인민행동당 온건파는 곧 당규 개정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인민행동당의 당원은 기간당원과 평당원으로 이원화하고 중앙집권위원의 자격은 기간당원으로 제한하였다. 당의 색깔에도 불구하고 인민행동당은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당의 정책결정 과정에는 참여를 봉쇄한 것이었다. 이로서 리콴유는 중국어 세계로부터 비난을 받지 않으면서 인민행동당의 지도부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을 합법적으로 완전히 축출할 수 있었다.

 

 1959 5월 영연방 내 자치국 싱가포르에서 최초의 총선이 치러졌다. 이 총선거는 새로운 시민법의 제정으로 유권자가 대촉 늘어난 가운데 실시되어 그 결과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시민권의 기준은 싱가포르 태싱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영국민 또는 영국식민지 시긴권 소지자로 2년 이상 싱가포르에 거주한 사람과 기타 지역에서 출생하여 8년 이상 싱가포르에 거주한 사람들이 포함되었다. 이에 따라 1955년의 선거에서 300,299명에 그친 유권자가 555,655명으로 대폭 늘어나게 되었다. 자치국 최초의 총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총 의석 51석 중에서 43석을 석권하였다. 이에 따라 리콴유는 자치국 싱가포르의 초대수상(Prime Minister)이 되었다. 이 총선은 싱가포르에서 중국어 세계를 장악하는 자가 승리한 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인민행동당의 압승은 신세대 영어 세계가 공산주의자를 매개로 중국어 세계를 포섭한 결과였다. 1959년 싱가포르 자치정부의 출범은 완전독립을 향한 반식민 투쟁의 마지막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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