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의 정치운동(1)
싱가포르 중국인들의 정치적 각성은 베이징 정부와 중국대륙에서의 정치발전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영사관이 개설되고 베이징 정부의 외교관과 관리들이 싱가포르를 방문하였으며, 양무파와 혁명파 인사들의 활동은 중국인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웠다. 제국 주의의 팽창과 중국의 분할위기는 ‘중국인’의 정체성과 민족주의 의식을 일깨웠다.
무술변법(변법자강운동, 백일유신_Hundred Days' Reform)의 실패는 화교들이 중국의 운명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갖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변법운동에 공감한 화교지도자들은 1898년 5월 ‘천남신문’을 창간하고 개혁운동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1900년 2월 캉유웨이의 싱가포르 방문으로 보황당 싱가포르 지회가 개설되었다.혁명파도 1900년 말 싱가포르에 근거지를 확보하였다. 1906년 4월 손문의 방문 이후 중국혁명동맹회 싱가포르지부인 성주동맹회 본부가 결성되어 반청 활동이 조직적으로 펼쳐졌다. 당시 싱가포르는 양무파와 혁명파 간의 이념 논쟁의 중심지였으며 중국 혁명운동의 중요한 자금원이었다.
신해혁명 후 중국국민당의 싱가포르지부가 결성되어 북경국민당 싱가포르 연락지부라는 명칭으로 당국에 등록했다. 싱가포르 국민당 지부의 일차적인 목적은 중국의 경제재건에 남양화교의 재력을 동원하자는 것이었다. 이후 원세개가 집권하면서 중국국민당을 불법화하자 싱가포르의 국민당 지도부는 원세개를 승인한 영국의 의혹을 우려하여 1914년 지부를 자진해서 해산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싱가포르 화교의 정치운동은 대중운동으로 확신되었고 싱가포르 국민당의 활동은 영국의 탄압 아래에서도 계속되었다. 1925년 영국은 국민당을 불법화하였지만, 그 조직은 비밀리에 중국어학교와 독서회를 통해서 삼민주의를 전파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국민등의 지도부는 대체로 사업가, 공장주, 고무농장주 등 화교상공회의소의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나, 일반 당원의 대부분은 중하층민이었다.
한편 1915년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항의해서 상인들을 중심으로 평화적인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중국의 5.4 운동 이후 반일 불매운동은 일본인 소유의 상점이나 공장과 가옥을 파괴하는 폭력적이고 대중적인 시위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 식민당국은 대중적인 반일시위 확산에 대해서 적극적인 진압자세를 견지하였다. 소강상태를 보이던 반일 민족주의 운동은 1937년의 중일 전쟁으로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 해협화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싱가포르의 중국인들은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항일 투쟁기금을 모금하고 일화배척운동에 참여하는 등 광범위한 민족구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대 말라야 무역은 이 대중운동의 영향으로 1938년의 경우 한 해전인 1937년 보다 무려 70퍼센트나 격감하였다.
중국의 위기로 촉발된 화교들의 민족주의 고양은 조국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경제적 피부에만 열중하여 방으로 분열된 채 독자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해 온 화교사회는 국민당 활동과 배일운동을 계기로 중국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민족주의는 반 식민 민족주의가 아니라 되돌아갈 고국에 대한 애국주의에 가까웠다. 즉,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한 중국 지향적인 맹목적 애국주의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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