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종 이민사회(2) – 이민사회 형성과 영어 교육의 대중화
싱가포르 사회는 이민에 의한 인종별 분화라는 기본적인 구획에 더하여 다시 인종 간의 계층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민사회의 주종을 이룬 중국인과 인도인 사회는 내부적으로 각 출신성분과 출신지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상이한 인종집단 간의 차이와 동일 인종 내부의 구분은 영국의 교육정책에 의해서 더욱 확대되었다. 영국은 1834년에 싱가포르 프리스쿨을 개설하여 영어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말레이인들에게는 말레이어 교육을 제공했다. 그러나 식민당국은 이민자들에게 그들의 종족 언어로 교육하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어 교육과 타밀(Tamil)어 교육은 부유한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의 사재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영어교육 확대에 박차를 가했다. 1889년과 1891년 두 차례에 걸쳐 행하여진 영국여왕의 장학금 수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혜자의 대부분이 중국계 청년들이었고 일부가 기타 아시아계였던 이 장학금 수혜자들은 영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싱가포르 사회에 의사, 계리사, 변호사 등 새로운 아시아계 엘리트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영어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직업인 집단의 출현은 소수의 부자들에게 독점된 것이긴 했지만 영어교육에 대한 수요를 더욱 증대시켰다. 1902년에 교육법이 제정되었고 1902년에서 1911년 사이에 영어학교의 수는 21배로 늘어났다. 1905년에는 중국인의 요청과 기부금에 의해 영어로 강의하는 의과학교가 개설되었다. 영어교육의 확산은 싱가포르 사회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즉, 영어권과 비 영어권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구분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는 인종 간의 간격을 넓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동일 인종 또는 종족내부에 또 다른 구분과 분할을 가져왔고 사회적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인종 이민사회(3) – 화교사회의 형성
싱가포르의 중국인 사회인 화교사회의 형성은 영국 식민정책의 산물이었다. 영국 시민정부는 노동력 도입을 주목적으로 한 이주민 유입정책으로 자유이민 무역상인들과 계약 노동자들이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특히 계약 노동자들이 싱가포르로 몰려들었다. 특히 계약 노동자 이민의 경우 쿨리(Coolie)라 하여 노예무역의 성격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자유계약 노동자 이민으로 변화된 것은 1870년대 이후의 일이었다. 중국인 계약노동자 이민을 지칭하는 쿨리는 곧 말레이 반도로부터 인근 인도네시아 군도로 전파되었다. 쿨리는 쿨리(kuli) 또는 노동자라는 보통명사화 되고 ‘노동일을 하다’(berkuli)라는 동사로도 쓰이게 되었다. 머지않아 계약노동자 이민이 중국계 뿐만 아니라 여러 동남아 국가에서도 생겨나자 인도네시아 쿨리 또는 필리핀 쿨리 등으로 쿨리의 의미도 따라서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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