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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싱가포르의 역사(5)

by 톡톡톡 레이나 2025. 3. 26.

 영국의 관할 하에 있었던 40(1826-1866) 여 년 동안 싱가포르는 중계무역항으로 자유무역정책에 힘입어 기간 중 무역 총액이 4배로 증가하고 거주인구도 8배로 급증하면서 지방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외형적인 성장과정에는 싱가포르의 자유무역에 관여하려는 인도 정청의 개입시도에 맞서 자유무역정책을 고수하려는 해협 상인들 간에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인도 정청으로서는 캘거타(Culcutta)나 구저라트(Gujerat) 가은 기존의 중계무역항의 기능이 싱가포르로 해서 위축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싱가포르가 자유무역항의 지위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시기이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무역관세뿐만 아니라 인두세와 소득세 등 일체의 직접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무역항정책은 무역상인들에게는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식민당국으로서는 심각한 재정난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싱가포르의 재정은 영국령 인도 정부의 지원과 중국인들이 주류를 이룬 아시아계 주민들의 도박세와 아편 판매로 유지되고 있었다. 영국령 인도 당국은 싱가포르항을 위한 예산증액에 대해서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무역세와 항만사용료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자유무역정책을 표방하여 이를 싱가포르 발전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던 상인집단은 모든 조세제도 도입에 반대하였다. 오히려 이들은 영령 인도 당국이 항만시설 개선에 인색하고 싱가포르 인근의 해적 소탕과 불법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말레이 유민들에 대해서 소극적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싱가포르의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노무자들로 인도인 죄수들을 끌어다 쓰는 문제나 중국인들의 이익단체 간의 암투로 인한 불안한 치안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마침내 싱가포르의 자류무역상인들은 영령 인도 당국이 해협식민지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반발하면서 해협식민지에 입법의회를 설립해 줄 것을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싱가포르 무역상인들은 1855년 기존의 통화인 스페인달러 대신에 인도의 통화인 루피를 해협 통화로 대체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화폐법 제정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1857년 해협식민지를 영국의 식민지성 관할로 이관해 줄 것을 본국 의회에 청원하였다. 영국의회는 해협식민지의 직할식민지화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였으나, 문제는 식민 정부의 재정과 방위비용이었다. 그러나 재정문제는 1863년 인지세를 도입하여 해결하였으나 방위문제는 계속해서 고심하고 있었다. 1866년 영국 육군성이 홍콩을 대신할 동양의 기지로서 싱가포르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싱가포르의 방위문제도 급진전하였다. 그리하여 1867 4월 싱가포르가 군사비 일부를 분담한다는 조건으로 해협식민지는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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