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플즈는 총독으로부터 ‘말라카 남방에 영국 선박의 자유로운 통과를 보장할 수 있는 양항’을 획득하라는 명령을 받고 곧바로 페낭으로 떠났다. 그는 이듬해인 1891년 페낭을 출발해 수마트라 중서부의 요충지 리아우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리아우에는 네덜란드 세력이 주재하고 있어, 그 대안으로 리아우에서 멀지 않은 싱가포르를 택하게 되었다. 1819년 1월 29일 현자 사정에 정통한 파콰하르(Farquhar)와 함께 래플즈는 싱가포르 섬에 역사적인 상륙을 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 래플즈는 영주와 예비협정을 맺고,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술탄(영주)에게 3,000 스페인달러의 연금 지급과 신변 및 지위보호를 약속하였다. 그 대가로 영국은 싱가포르에 공장과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조호를 영주와 동인도회사의 총독을 대리한 스탬포드 래플즈가 예비협정을 체결한 1891년 1월 30일은 근대 싱가포르의 역사가 시작된 날이었다.
그러나 조호르 영주로부터 예비협정의 정식승인은 장애에 부딪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가 조호르 왕국의 재배권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래플즈는 조호르의 왕위 계승 분쟁을 이용하여 이미 왕위 경쟁에서 밀려나 있던 영주의 이복형을 조호르의 영주에 앉혀 2월 6일 동맹조약의 서명에 성공한다. 래플즈는 “이 조약의 체결로 말라카 해협의 남부 관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식민지 건설이 완성되었다.”라고 단정 지었다.
이와 같은 래플즈의 독단적인 싱가포르 영유에 대해 네덜란드는 즉각적으로 반발하였다. 조호르 왕국의 일부인 싱가포르가 영국에 점유당하자 네덜란드는 군사적 위협을 가하였다. 그러나 말라카 해협에서 네덜란드의 독주를 견제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영국정부는 비록 네덜란드와 분쟁을 원치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싱가포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영국동인도회사가 싱가포르 문제를 런던정부로 떠넘기면서 싱가포르항의 생존 여부는 런던과 덴 하흐 간의 외교문제로 이전되었다. 양국 간의 교섭이 장기화되는 사이에 싱가포르는 탁월한 입지조건에 힘입어 동남아의 새로운 무역거점으로 자리 잡아갔다.
싱가포르는 1819년부터 1823년까지 벤쿨렌의 부지사 래플즈의 관할 하에 놓였다. 이 기간 동안 래플즈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항만, 조선소, 창고시설, 경찰서, 재판소, 상점, 극장, 학교, 교회,시장, 식물원등이 건설되었다. 주민들의 거주구역은 인종별로 나뉘었고, 이들을 관할하기 위하여 영국법에 기초한 법령들이 만들어졌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싱가포르가 중계무역항으로 성공한 결정적인 이유인 ‘무관세 자유무역’과 ‘자유이민정책’ 등 두 가지 원칙이 확립되었다. 그 결과 싱가포르는 수년 사이에 세 지역 거점으로 분산되었던 말라카 해협무역을 싱가포를 중심으로 재편성하는데 성공했다.
래플즈가 관할한 기간은 싱가포르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래플즈가 체결한 조약에는 싱가포르의 주권이나 토지의 할양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영국 관할지역 내의 토지 소유권자는 여전히 말레이시아 술탄과 조호르 영주였고, 이들 말레이 수장들이 주재관의 협조 아래 정세권과 사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과 말레이인들의 공동 관심사는 주재관-술탄-영주로 구성되는 평의회의 심의를 거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싱가포르는 영국동인도회사가 섬의 일부지역을 교역거점으로 확보하고, 주재관이 벤쿨렌의 지시를 받아 그 구역을 관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싱가포르는 여전히 통치체계상 삼자통치 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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