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무역(1)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120여 년에 걸친 영국 식민통치 하 싱가포르의 번영은 탁월한 지리적 이점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무역상인의 활동력이 합쳐진 결실이었다. 싱가포르의 자유무역항 정책은 유럽 상인들을 무역독점과 고율 관세 등의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계 무역업자들인 중국상인들이나 자바해의 유능한 해양종족인 칼리만탄(Kalimantan)의 부기스(Bugis)족들 간의 세력균형에도 기여하였다. 싱가포르의 지리적 이점은 자유무역주의 시대의 필요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개발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싱가포르의 급속한 성장은 말라카 해협의 중심으로 산재되었던 기존의 무역망을 싱가포르항으로 집결하여 재정비한 결과였다.
싱가포르는 서구 열강들의 경쟁적인 산업화와 급속한 제국주의 행창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이는 기존의 동남아 토착무역을 활성화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싱가포르를 경유하는 중계무역에서 향신료나 사치성 해협산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고 주석, 고무, 설탕 등 공산품 원료의 비중이 증대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특히 미국에서 전기와 자동차공업의 발흥에 힘입어 고무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싱가포르의 무역에서 고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의 주석 수출을 압도하게 되었다.
1938년에 싱가포르는 세계 고무시장의 41퍼센트를 공급하였다. 1887년 주석제련소가 설립된 이래 싱가포르는 주석 원석의 중계무역항에서 세계 최대의 주석 제련의 중심지로 탈바꿈하였다. 식품 산업의 발달로 통조림이 식탁을 덮게 되자, 싱가포르에서 제련되어 전량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이로 인해서 원석 공급은 계속해서 수요를 따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주석 원석은 말레이 반도에서뿐만 아니라 사이얌(태국),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미얀마, 호주와 심지어는 중남 아프리카로부터도 들어왔다. 고무와 주석에 이어 석유가 곧 중요한 무역품목으로 등장하였다. 자바해 인근의 수마트라, 칼리만딴, 사라왁 등지에서 산출된 원유는 싱가포르항을 경유해 수출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전 싱가포르의 원유무역 총액은 20억 해협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무역이 확대되고 동남아가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재편될수록 싱가포르의 무역은 급증하였다. 이는 싱가포르가 서구 산업사회와 식민지 동남아 경제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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