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인종 이민사회(1) -이민사회 형성과 영어 교육의 대중화
자유무역항 싱가포르의 출현은 교역의 확대뿐만 아니라 대량의 이주민 유입을 촉발했다. 새로운 경제적 기회와 대역제국의 식민지라는 상대적 안정감에 더하여, 전통적 권위와 상업에 대한 규제가 없다는 것이 매력적인 흡인요인이었다. 1819년에 1,000명 수준에 불과하던 싱가포르의 인구는 1840년에 35,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1860년에는 8만 명을 돌파하였다. 20세기 원년인 1901년에 이르러 싱가포르의 인구는 23만여 명이 되었다. 1921년의 43만여 명에서 만 10년 후인 1931년에 57만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1940년에는 무려 77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1년까지 싱가포르는 남성의 비율이 여성보다 2배 이상 많았고, 1920년 이전까지의 평균 사망률이 1,000명당 30명이나 되었다. 그러므로 싱가포르의 급속한 인구 증가는 전적으로 이민에 의한 것이었다. 싱가포르 개발 초기에는 주로 무역업자들의 상업 이민이었으며, 1840년대 이후 말레이 반도의 주석광산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후에는 노동력 이민이 확대되었다. 그러므로 싱가포르의 번영은 이민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이들 이민들에 의해서 싱가포르의 번영이 이루어진 것이다.
래플즈 때부터 시작된 자유이민 정책으로 싱가포르는 말레이인은 물론이고 중국인, 인도인을 필두로 자바(Java)족, 부기스(Bugis)족 등 해양부 동남아의 유능한 종족과, 유럽인뿐아니고 아르메니아(Armenia)인 같은 중앙아시아인과 유라시아(Eurasia)인과 아랍인들까지 여러 인종과 종족이 함께 하는 다인종 사회를 이루었다. 말레이인들도 싱가포르 토착민이라기보다는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나 자바 등지에서 건너온 외지인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이들 말레이인들은 1827년 이래 계속해서 대량으로 밀려오는 중국인들로 인해서 최다수 종족의 지위를 중국인들에게 내주게 되었다. 싱가포르의 중국인 주민의 비율은 1867년에 이미 65퍼센트를 기록한 이래 1921년에는 76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이후 싱가포르 인구의 3/4을 중국계가 점하는 인구 구성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명한 색깔의 현대식 이슬람국가를 지향하는 말레이시아와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 등 이슬람문화권의 ‘말레이 세계’라는 큰 바다에 고립되어 있는 ‘비 말레이인들의 섬’이라는 싱가포르의 특이성이 ‘번영된 식민지’에서 비롯된 이 섬나라의 숙명이었다.
영국 식민당국은 처음부터 이들 이민사회를 인종별로 구획하였다. 각각의 이민사회는 독자적인 거주지 내에서 고유한 언어, 관습, 종교를 보유한 채 식민 사회의 구조 속에서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였다. 영국인 자본가들이 주축을 이룬 소수의 유럽인 사회가 지배적인 지위를 장악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피부의 색깔보다는 돈의 색깔을 중시했다. 부유한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 상인들은 유럽인과 더불어 싱가포르 사회의 상위계층을 차지했으며, 이들은 식민당국과 자신들이 속한 이민사회의 중개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역할과 기능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식민당국도 이에 따른 적절한 예우와 보답으로 화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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